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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은 우리민족이 어려울 때마다 정신적 지주가 되어 희망과 용기를 심어준 투혼의 경기였다. 올림픽에서는 온 국민이 하나되어 성원했고, 우승했을 때는 다같이 기쁨을 나누었던 국민의 스포츠이기도 했다.

코오롱과 마라톤

이런 마라톤과 코오롱의 인연은 1981년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이 한국기록 경신에 포상금(1억 5천만원)을 내 걸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1982년에는 고교단축 마라톤대회를 창설하여 저변확대와 우수선수 발굴에 나섰고, 이 대회는 1985년 전국남녀고교 구간마라톤대회로 탈바꿈한 후 , 2006년에는 중학교 구간마라톤대회도 추가 신설하여 명실상부한 한국마라톤 꿈나무 육성의 산실로 자리잡아 왔다. 이와 병행 하여 코오롱은 1987년에 승부사 정봉수 감독을 영입하여 코오롱 마라톤팀을 창단하였다. 김완기, 황영조, 이봉주, 김이용, 권은주, 지영준 등 한국마라톤 역사를 새로 쓴 이들 이 바로 코오롱 마라톤팀을 거쳐간 한국 마라톤의 주역들 이었다.

마라톤의 발자취

태동기 내용
태동기

1981년 11월 17일 이동찬 명예회장이 한국마라톤 기록갱신자에 연구장려비 지급을 발표하였다. 또한 1982년 부터 대구에서 고교 단축 마라톤대회를 육상연맹과 공동 개최될 것도 이날 발표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코오롱과 마라톤이 인연을 맺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후 고교 단축마라톤대회는 1982년 4월 25일 대구에서 1회 대회를 개최 하였다.연구 장려비는 3년 만인 1984년 3월 20일 동아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15분 벽을 깬 이홍렬 선수에게 오천만원이 지급 되었다. 그리고 1억원은 10여년 만인 1992년 2월21일 벳푸~오이타마라톤에서 2시간8분47초의 기록으로 10분 벽을 깬 황영조선수가 거머쥐었다. 또한 1984년 1월 16일 코오롱상사는 마라톤부를 창단 하였다. 이영재코치, 곽해년, 박경란 2명의 여자 선수가 전부 였다. 하지만 이것은 1987년 코오롱마라톤팀이 정식 창단하게 되는 토대가 되었다. 또 코오롱이 한국 마라톤 중흥의 산실로서 자리 잡게되는 서막이었다.

탄생기
탄생기

1987년 5월 1일 코오롱은 정봉수감독, 김종윤, 김현철선수를 영입, 마라톤팀을 정식 창단 하였다.

1988년에 개최될 서울올림픽에서 마라톤 종목 상위권 입상을 겨냥, 유망선수들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고자 하는 당시 이동찬회장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창단 1년만에 올림픽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는 것은 무리였다.

1988년에는 코오롱 고교구간 마라톤대회를 통해 배출된 김완기선수가 입단하여 11월 경부 역전 경주대회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다.

또 이창우, 박재오선수가 입단, 1988년을 지나면서 코오롱마라톤팀은 차츰 마라톤팀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바로 이듬해 1999년 1월 코오롱마라톤팀의 신인 선수들은 전국 남녀 실업 단축 마라톤대회(30km)에 출전, 남자부 단체우승과 개인우승(이창우)을 차지하면서 1990년대 한국 마라톤 중흥의 기수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성장기
성장기

1990년 3월 18일 동아 마라톤대회에서 마라톤 풀코스 첫 도전에 나선 김완기 선수가 2시간 11분 34초로 한국최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 한다. 이것은 신호탄 이었다. 이때부터 코오롱마라톤팀은 한국 최고의 마라톤팀으로 성장을 시작하게 된다.

그 해 10월 이창우선수는 전국체전 마라톤에서 우승 하였다. 불과 2개월 후인 12월 그는 일본 요미우리 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12분 10초로 대회최고 기록을 세우며 또다시 우승한다. 한편 1월에 입단한 황영조선수는 경부 역전 경주대회에서 최우수신인상을 받아 그 가능성을 확인 시켜 주었다. 이들은 91년 시즌 첫 대회인 동아 마라톤대회에서 나란히 2위와 3위를 차지하였다. 91년 7월 영국 쉐필드에서 개최된 유니버스아드대회 마라톤에서 황영조선수는 풀코스 두번째 도전만에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이것은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이후 세계 종합 대회에서 이룬 두번째 쾌거 이었으며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우승의 서곡이었다. 또 10월 조선일보마라톤대회에서는 김완기 선수가 2시간 11분 02초의 기록으로 본인의 한국최고 기록을 다시 깨뜨리며 우승 함으로써 91년 한해를 코오롱마라톤팀의 해로 만들었다.

전성기
전성기

1992년 2월 21일 일본 벳푸~오이타 마라톤대회에서 황영조 선수는 2시간 08분 47초 한국 최고기록을 세우며 2시간 10분벽을 돌파한 한국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이것이 코오롱마라톤팀의 전성기가 시작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 이었다. 황영조 선수는 같은해 8월 10일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였다. 황영조의 우승은 한국마라톤이 풀지 못하고 있던 56년간의 한을 한 순간에 씻어 내렸다.

1996년 동아마라톤에서 이봉주 준우승 차지하며 대표 선발되어 그해 애틀란타올림픽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1998년 로테르담 마라톤대회에서 한국최고기록(2시간 7분 44초)을 세우며 준우승을 하였고,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3연패를 달성하였다. 1999년 선수와 코치의 팀 이탈이라는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하여 결과적을오 많은 관계자들과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걱정을 끼쳐드리기도 하였다. 2001년 7월 정봉수 감독 서거 이후 2001년 9월 정하준 감독이 새로이 취임하여 마라톤팀을 이끌어왔다. 지영준, 박영민, 황준현 선수가 국내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마라톤 명가로서 자존심을 지켜왔다.

재도약
재도약

2010년 11월 27일 중국 광저우아시안 게임에서 지영준 선수는 2시간11분11초로 골인하며 8년만에 금메달을 안겨주었다.

지영준 선수가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우승 이후에도 코오롱 마라톤팀은 새로운 변신과 거듭남을 준비하여 2011년 9월 정만화 감독을 새로이 영입하고 팀 운영상의 미숙하고 부족했던 점을 모두 바꾸고 한국 마라톤의 신화를 위한 팀을 재정비하였따.

이제 다시 첫 마음으로,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 마라톤과 인연을 맺어 신화를 이루었던 처음의 그 열정과 정성으로 새로운 한국의 마라톤 신화를 계속 이어 써나갈 것입니다.